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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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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마 전투는 200년, 후한 말 군벌 시대에 조조와 원소 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원소는 장수 안량에게 백마현을 공격하게 했고, 조조는 순유의 계책에 따라 관우를 선봉으로 백마를 구원하여 안량을 베는 등 승리했다. 이 전투는 관도 전투의 서막으로, 조조가 원소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중원 패권을 장악하는 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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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분쟁후한말 관도 전역
시기200년 음력 3월 ~ 5월 (추정)
장소현재의 중국 허난성 화현 근교
결과조조의 승리
관련 전투관도 대전의 일부
교전 세력
교전 세력 1원소
교전 세력 2조조
지휘관 및 지도자
지휘관 (원소군)원소
안량
곽도
순우경
지휘관 (조조군)조조
유연
관우
서황
장료
순유
동소
병력 규모
병력 (원소군)약 10,000명 (안량 지휘 하)
병력 (조조군)불명, 원소군보다 열세
캠페인 정보
관련 전역관도 대전
주요 전투독시진
백마
연진
관도
창정

2. 배경

190년대에 후한 왕조는 군벌 시대로 분열되었다.[2] 수년간의 재편성과 합병 이후, 중국 북부는 황하를 경계로 두 군벌, 즉 북쪽의 원소와 남쪽의 그의 옛 동맹 조조에 의해 분할되었다.[2] 대결이 불가피해지자 두 군벌은 황하를 따라 방어 위치에 병력을 집결시키기 위해 다투었다.[2]

당시 백마(白馬, 현재 허난성 화현 근처)는 랴오양(黎陽, 현재 허난성 쉰현 북서쪽) 건너 강 남쪽에 위치해 있었고, 랴오양은 군사 징집의 주요 기지였다.[2] 백마와 랴오양 사이의 도하는 원소와 조조 영토 사이의 주요 남북 경로에서 전략적 연결 고리로서 엄청난 중요성을 지닌 것으로 여겨졌다. 199년 9월 8일과 10월 7일 사이 어느 시점에, 조조는 랴오양 근처로 진격하여 정찰 작전을 벌였고 동군의 태수인 유연(劉延)을 백마에 주둔시켰다. 백마의 위치는 조조의 군대가 중요한 여울을 감시할 수 있게 해주었고, 원소 군대에 대한 첫 번째 방어선 역할을 했다. 그러나 조조는 지형적으로 유리한 남쪽의 관도(官渡, 현재 허난성 중무현 북동쪽)에서 집중적인 대결을 목표로 했으므로, 백마를 방어하는 목적은 단지 적의 강 건너 진격을 지연시키는 것이었다.

조조는 또한 우금을 인근 연진(延津, 현재 허난성 옌진현 북쪽)에 2,000명의 병력과 함께 배치하고 허창으로 돌아가 추가적인 전투 준비를 했다. 그는 200년 2월 3일에서 3월 2일 사이에 서주에서 유비의 반란을 진압한 후 관도로 돌아와 전투 지휘를 했다.

2. 1. 후한 말의 혼란과 군벌들의 발호

189년 영제 사후 정변으로 환관 세력이 몰락하고, 외척 대장군 하진이 암살당했다. 이후 동탁이 권력을 장악했으나, 조조를 비롯한 관동의 제후들이 연합하여 동탁에 대항했다. 동탁 암살 후, 장안은 혼란에 빠졌고, 헌제는 동승 등의 보호를 받다가 탈출했다.

190년대후한 왕조는 군벌 시대로 분열되었다.[2] 수년간의 재편성과 합병 이후, 중국 북부는 황하를 경계로 북쪽의 원소와 남쪽의 조조에 의해 분할되었다.[2] 당시 백마(白馬, 현재 허난성 화현 근처)는 랴오양(黎陽, 현재 허난성 쉰현 북서쪽) 건너 강 남쪽에 위치해 있었고, 랴오양은 군사 징집의 주요 기지였다.[2]

원소는 여남 원씨 출신으로, 189년 영제가 죽은 후의 정변 당시 환관 세력과 대항하는 하진을 따랐고, 하진 암살 후에는 십상시를 몰살하는 것을 지휘했다. 그 후 권력을 장악한 동탁에게 쫓겨났지만, 조조 등 관동 제후들의 맹주가 되었고, 동맹 해소 후에도 군웅의 리더 격 중 한 명으로 기주 하북에 세력을 구축하여 동탁과 원술, 북방에서 하북 진출을 노리는 공손찬과 대립하면서 세력을 넓혔다.

원소가 하북에서 공손찬과 다툼을 계속하는 한편, 조조는 처음에는 원소에게 복속되어 그의 무장으로서 하남으로 파견되었고, 원소의 대항자였던 원술, 서주를 중심으로 세력을 축적했던 도겸, 동탁을 암살한 무력을 자랑하는 여포와 같은 세력을 몰아내고 원소로부터 자립하여 한쪽의 영웅이 되었다.

헌제가 탈출해 오자, 원소는 헌제를 폐위할 생각도 있었고, 가신단이 찬성파와 반대파로 나뉘어 의견을 수렴할 수 없었다. 그 사이에 조조는 허의 땅으로 헌제를 맞이하여 천하에 호령할 명분을 얻게 되었다.

199년 3월, 원소는 역경 전투에서 공손찬을 멸망시켰다. 그 사이에도 각지에 세력을 넓혀 기주·청주·병주·유주의 사주를 다스리는 하북 최대의 세력이 되었다. 더욱이 북방의 주변 민족인 오환 세력과 우호 관계를 맺어 후환을 없앴고, 조조와의 대결 자세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한편, 조조도 197년 가을 9월에 원술을 진나라 (진말)](陳)] 전투에서 대패시켰고,

2. 2. 원소와 조조의 세력 확장

190년대에 후한 왕조는 군벌 시대로 분열되었다. 수년간의 재편성과 합병 이후, 중국 북부는 황하를 경계로 두 군벌, 즉 북쪽의 원소와 남쪽의 그의 옛 동맹 조조에 의해 분할되었다.[2]

원소는 후한의 명문 여남 원씨 출신이며, 189년 영제 사후 정변 당시 환관 세력과 대항하는 외척대장군 하진을 따랐고, 하진 암살 후에는 십상시를 몰살하는 것을 지휘했다. 그 후 권력을 장악한 동탁에게 쫓겨났지만, 조조 등 관동 제후들의 맹주가 되었고, 동맹 해소 후에도 군웅의 리더 격 중 한 명으로 기주 하북에 세력을 구축하여 동탁과 일족인 원술, 북방에서 하북 진출을 노리는 공손찬과 대립하면서 세력을 넓혔다. 199년 3월, 원소는 역경 전투에서 공손찬을 멸망시키고 기주, 청주, 병주, 유주를 아우르는 하북 최대 세력이 되었다. 또한 북방 민족인 오환과 우호 관계를 맺어 후방의 위협을 제거했다.

한편, 조조는 처음에는 원소에게 복속되어 그의 무장으로서 하남으로 파견되었으나, 원소의 대항자였던 원술, 서주를 중심으로 세력을 축적했던 도겸, 동탁을 암살한 무력을 자랑하는 여포와 같은 세력을 몰아내고 원소로부터 자립하였다.

동탁 암살 후 혼란스러운 장안에서 동승 등에 의해 보호받던 헌제가 탈출하자, 원소는 헌제를 폐위할 생각도 있었고, 가신단이 찬반으로 나뉘어 의견을 수렴할 수 없었다. 그 사이에 조조는 허의 땅으로 헌제를 맞이하여 천하에 호령할 명분을 얻게 되었다. 원소는 조조의 지휘를 받는 것을 싫어하여 조조의 정치에 간섭했지만, 원소에게는 공손찬, 조조에게는 원술·여포·유표·장수와 같은 강적이 근처에 존재했기 때문에, 양자 간의 균열은 결정적인 것이 되지 않았다. 197년 가을 9월에 조조는 진나라 전투에서 원술을 대패시켰고, 198년에는 장수·유표와 여포에게 공세를 취하여 12월에는 하비성 전투에서 여포를 멸망시켰다. 조조는 원소의 관직을 박탈하는 등, 그 세력권을 위협하는 책략을 펼쳤고, 양자의 전면 대결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2. 3. 양 진영의 갈등 심화

190년대후한 왕조는 군벌 시대로 분열되었고, 황하를 경계로 북쪽의 원소와 남쪽의 조조가 대립하게 되었다. 199년 3월, 원소는 역경 전투에서 공손찬을 멸망시키고 하북 최대 세력이 되어 조조와의 대결 자세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한편, 조조는 197년 가을 9월에 진나라 전투에서 원술을 대파하고, 198년 하비성 전투에서 여포를 멸망시키는 등 세력을 확장하며 원소의 세력권을 위협했다.

조조는 199년 여름 4월, 암살된 장양의 진영을 지도하던 수고가 원소에게 붙으려 하자 사환, 조인 등의 군대를 파견하여 저지하고, 장양의 옛 신하인 동소를 이용해 장양의 세력을 흡수했다. 같은 해 가을 8월, 조조는 원소에 대비하기 위해 황하 강가 요충지인 려양에 진을 치는 동시에 장패에게 명하여 청주 방면에서 원소를 견제했다. 우금을 대비로 두고, 9월에는 허도로 귀환했다.

과거 (197년 봄 정월), 완성에서 조조를 격파한 적이 있는 장수는 형주의 유표와 결탁하여 자주 조조를 괴롭혔으나, 199년 겨울 11월에 군대를 이끌고 항복했다. 조조는 장수를 열후에 봉하고, 더 나아가 그의 참모인 가후를 중용했다.

이 사이에, 원소와의 세력 합류를 꾀한 예주의 원술을 견제하기 위해 예주 자사로 엄상을 파견했고, 더 나아가 서주에는 유비를 파견했다. 199년 6월 (『후한서』 헌제기), 고립된 원술은 실의 속에서 병사했다.

200년 봄 정월, 허도에서 동승의 모반이 발각되었고, 몰래 동승과 호응했던 유비도 서주에서 자사인 차주를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조조는 동승 일파를 처형하고, 유비를 치기 위해 친정했다. 원소의 참모인 전풍은 조조의 뒤를 칠 것을 진언했지만, 원소는 아들의 병을 이유로 출진을 허락하지 않았다. 조조는 유비를 패주시켰고, 그 부장인 하후박과 관우포로로 잡았다. 유비는 원소에게 의탁하여 도망쳤다.

3. 전투의 전개

200년 2월, 원소는 장수 안량에게 곽도순우경을 배속시켜 유연이 지키는 백마현을 공격하게 했다.[1] 저수는 안량이 용맹하지만 성격이 급하여 혼자서는 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고 반대했지만, 원소는 듣지 않았다.[1]

이에 조조순유의 계책에 따라 병력을 나누어 연진으로 향하는 척하며 원소군을 유인하고, 관우장료를 선봉으로 백마를 구원했다.[1] 관우는 멀리서 안량의 기치를 보고 수천 명의 적군을 뚫고 돌진하여 단칼에 안량을 베고 그의 머리를 베어 돌아왔다.[1] 이로써 백마의 포위는 풀렸다.[1]

관우가 안량을 베는 목판화.


이 전투에서 관우의 용맹함이 돋보였으며, 이는 훗날 삼국지연의에서 더욱 극적으로 묘사된다.

원소는 장수 안량에게 곽도, 순우경을 배속시켜 강을 건너 유연의 백마 진지를 공격하게 했고, 주력 부대를 이끌고 여양에 남아 강을 건너는 시늉을 했다.[1] 저수는 안량이 용맹하지만 성격이 급하여 혼자서는 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고 반대했지만, 원소는 그의 조언을 무시했다.[1]

유연의 백마 진지에 주둔한 소수의 병력은 완강하게 저항하여, 포위전은 5월까지 32일 이상 지속되었고, 이에 조조는 백마를 구원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었다.[1] 조조의 책사 순유는 유인 작전을 사용하여 원소의 군대를 분산시키고 덜 유능한 안량을 제거할 것을 제안했다.[1] 조조는 이 계획에 따라 강을 건너 원소의 배후를 공격하는 것처럼 연진으로 진군했다.[1] 이러한 위협에 대응하여 원소는 여양에 있던 병력을 분산시켜 강 북쪽 둑을 따라 서쪽으로 이동했고, 결국 유인책에 걸려들었다.[1] 조조는 재빨리 경무장 병력을 이끌고 동쪽으로 백마를 향해 진격하여, 안량과 백마 진지에서 서쪽으로 약 10 리 떨어진 곳에서 교전했다.[1] 조조는 장료관우를 선봉으로 보냈고, 관우는 안량을 베어 죽였다.[1] 이로써 백마의 포위는 풀렸다.[1]

백마의 포위를 푼 조조는 주민들을 이주시키려 했다. 원소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장군 문추에게 도하를 명했다. 문추는 유비와 함께 연진의 남쪽까지 왔는데, 마침 그때 백마로부터의 군수 물자 부대가 도착했다. 조조와 순유는 이를 이용해 문추 군의 질서가 흐트러지기를 기다려 습격하려 했다. 문추의 군은 약탈을 시작했고, 당초 5~6천 명이나 있던 기병도 600명도 안 되는 수까지 감소했다. 이를 본 조조는 문추의 군을 공격하여 궤멸시키고 문추를 전사시켰다.

명장으로 알려져 있던 안량, 문추를 한 번의 전투로 참한 조조군의 용맹함은 널리 알려졌다.

200년 3월, 원소는 장수 안량에게 곽도, 순우경을 배속시켜 유연의 백마 진지를 공격하게 했다. 저수는 안량이 용맹하지만 성격이 급하여 혼자서는 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고 반대했지만, 원소는 듣지 않았다.[1] 유연의 백마 진지는 5월까지 32일 이상 완강하게 저항했다.[1]

조조순유의 유인 작전을 받아들여, 연진으로 진군하여 원소의 배후를 공격하는 척했다. 원소는 여양에 있던 병력을 분산시켜 강 북쪽 둑을 따라 서쪽으로 이동하여 유인책에 걸려들었다. 조조는 재빨리 경무장 병력을 이끌고 동쪽으로 백마를 향해 진격하여 안량과 교전했다. 장료관우가 선봉으로 나섰고, 관우는 안량을 단칼에 베어 죽였다. 이로써 백마의 포위는 풀렸다.[1]

조조는 국지적인 승리를 거듭했지만, 원소의 주력은 건재했고, 예주에서는 대부분의 군이 원소에게 호응했다. 유비는 원소의 명령으로 예주의 황건적 잔당을 모아 조조의 배후를 위협했고, 손책도 허도를 노린다는 소문이 돌았다.

전력과 물량에서 우세한 원소에 맞서 조조는 관도로 전략적 후퇴를 했다. 원소는 황하를 건너 양무까지 진출했다. 관우는 유비의 소식을 듣고 조조의 곁을 떠났다.

순욱, 종요, 이통, 조엄 등의 후방 지원에도 불구하고, 조조는 병량이 부족한 상황에 놓였다. 그러나 원소 진영은 전풍과 저수가 멀어지는 등 내분이 심각했다. 200년 10월, 원소는 순우경 등에게 오소에서 병량 수송을 맡겼으나, 원소에게 실망한 허유가 조조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공격을 권했다. 조조는 오소를 기습하여 병량 창고를 불태웠다(오소 전투). 원소는 곽도장합의 대립 등으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오소의 병량을 잃고 패주했다.

3. 1. 백마 전투 (200년 2월)

200년 2월, 원소는 장수 안량에게 곽도순우경을 배속시켜 유연이 지키는 백마현을 공격하게 했다.[1] 저수는 안량이 용맹하지만 성격이 급하여 혼자서는 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고 반대했지만, 원소는 듣지 않았다.[1]

이에 조조순유의 계책에 따라 병력을 나누어 연진으로 향하는 척하며 원소군을 유인하고, 관우장료를 선봉으로 백마를 구원했다.[1] 관우는 멀리서 안량의 기치를 보고 수천 명의 적군을 뚫고 돌진하여 단칼에 안량을 베고 그의 머리를 베어 돌아왔다.[1] 이로써 백마의 포위는 풀렸다.[1]

이 전투에서 관우의 용맹함이 돋보였으며, 이는 훗날 삼국지연의에서 더욱 극적으로 묘사된다.

3. 2. 연진 전투 (200년)

원소는 장수 안량에게 곽도, 순우경을 배속시켜 강을 건너 유연의 백마 진지를 공격하게 했고, 주력 부대를 이끌고 여양에 남아 강을 건너는 시늉을 했다.[1] 저수는 안량이 용맹하지만 성격이 급하여 혼자서는 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고 반대했지만, 원소는 그의 조언을 무시했다.[1]

유연의 백마 진지에 주둔한 소수의 병력은 완강하게 저항하여, 포위전은 5월까지 32일 이상 지속되었고, 이에 조조는 백마를 구원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었다.[1] 조조의 책사 순유는 유인 작전을 사용하여 원소의 군대를 분산시키고 덜 유능한 안량을 제거할 것을 제안했다.[1] 조조는 이 계획에 따라 강을 건너 원소의 배후를 공격하는 것처럼 연진으로 진군했다.[1] 이러한 위협에 대응하여 원소는 여양에 있던 병력을 분산시켜 강 북쪽 둑을 따라 서쪽으로 이동했고, 결국 유인책에 걸려들었다.[1] 조조는 재빨리 경무장 병력을 이끌고 동쪽으로 백마를 향해 진격하여, 안량과 백마 진지에서 서쪽으로 약 10 리 떨어진 곳에서 교전했다.[1] 조조는 장료관우를 선봉으로 보냈고, 관우는 안량을 베어 죽였다.[1] 이로써 백마의 포위는 풀렸다.[1]

백마의 포위를 푼 조조는 주민들을 이주시키려 했다. 원소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장군 문추에게 도하를 명했다. 문추는 유비와 함께 연진의 남쪽까지 왔는데, 마침 그때 백마로부터의 군수 물자 부대가 도착했다. 조조와 순유는 이를 이용해 문추 군의 질서가 흐트러지기를 기다려 습격하려 했다. 문추의 군은 약탈을 시작했고, 당초 5~6천 명이나 있던 기병도 600명도 안 되는 수까지 감소했다. 이를 본 조조는 문추의 군을 공격하여 궤멸시키고 문추를 전사시켰다.

명장으로 알려져 있던 안량, 문추를 한 번의 전투로 참한 조조군의 용맹함은 널리 알려졌다.

3. 3. 관도 전투 (200년 10월)

200년 3월, 원소는 장수 안량에게 곽도, 순우경을 배속시켜 유연의 백마 진지를 공격하게 했다. 저수는 안량이 용맹하지만 성격이 급하여 혼자서는 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고 반대했지만, 원소는 듣지 않았다.[1] 유연의 백마 진지는 5월까지 32일 이상 완강하게 저항했다.[1]

조조순유의 유인 작전을 받아들여, 연진으로 진군하여 원소의 배후를 공격하는 척했다. 원소는 여양에 있던 병력을 분산시켜 강 북쪽 둑을 따라 서쪽으로 이동하여 유인책에 걸려들었다. 조조는 재빨리 경무장 병력을 이끌고 동쪽으로 백마를 향해 진격하여 안량과 교전했다. 장료관우가 선봉으로 나섰고, 관우는 안량을 단칼에 베어 죽였다. 이로써 백마의 포위는 풀렸다.[1]

조조는 국지적인 승리를 거듭했지만, 원소의 주력은 건재했고, 예주에서는 대부분의 군이 원소에게 호응했다. 유비는 원소의 명령으로 예주의 황건적 잔당을 모아 조조의 배후를 위협했고, 손책도 허도를 노린다는 소문이 돌았다.

전력과 물량에서 우세한 원소에 맞서 조조는 관도로 전략적 후퇴를 했다. 원소는 황하를 건너 양무까지 진출했다. 관우는 유비의 소식을 듣고 조조의 곁을 떠났다.

순욱, 종요, 이통, 조엄 등의 후방 지원에도 불구하고, 조조는 병량이 부족한 상황에 놓였다. 그러나 원소 진영은 전풍과 저수가 멀어지는 등 내분이 심각했다. 200년 10월, 원소는 순우경 등에게 오소에서 병량 수송을 맡겼으나, 원소에게 실망한 허유가 조조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공격을 권했다. 조조는 오소를 기습하여 병량 창고를 불태웠다(오소 전투). 원소는 곽도장합의 대립 등으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오소의 병량을 잃고 패주했다.

4. 전투의 결과 및 영향

연진 전투에서 조조는 원소의 유명한 장수 중 한 명인 문추를 죽여 적의 사기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다. 이 승리로 조조는 방해받지 않고 관도로 퇴각하여 최종 결전을 준비했다.

관우는 안량을 죽인 공로로 제후의 작위를 받았으나, 조조의 관대함에 보답했다고 생각하여 조조에게 받은 모든 것을 남겨두고 유비에게 돌아갔다. 조조는 관우의 충성심에 감탄하여 추격을 허락하지 않았다.

201년, 조조는 창정까지 군사를 진격시켜 원소의 주둔군을 격파했다(창정 전투). 원소는 영내의 반란 진압에 몰두하는 가운데 202년에 병사했다.

원소의 후계자를 원담원상이 다투면서 원씨의 세력은 양분되었다.

조조는 곽가의 진언에 따라 원담과 잠시 동맹을 맺고 원상과 싸워 204년 8월에는 원상의 신하 심배가 지키는 을 함락시키고 원상을 유주로 몰아냈다. 다음으로 원상의 세력을 흡수하려던 원담을 핑계 삼아 공격하여 205년 정월에 남피에서 원담과 곽도를 참수했다. 원담의 본거지였던 청주에는 장료 등을 파견하여 평정했다.

조조는 더욱 원상 등을 쫓아 유주로 진격하여 207년 8월에는 유성 전투에서 오환의 답돈을 참수하는 등 원씨의 명맥을 완전히 끊고, 더 나아가 오환과 요동의 공손씨를 복속시켰다. 또한, 관중과 병주 방면에서도 원씨 진영의 고간곽원을 멸망시키는 한편, 장연, 마등, 한수, 왕읍 등을 복속시키는 등 조조는 그 세력권을 크게 넓히게 되었다.

4. 1. 원소의 몰락과 조조의 패권 장악

201년, 조조는 창정까지 군사를 진격시켜 원소의 주둔군을 격파했다(창정 전투). 원소는 영내의 반란 진압에 몰두하는 가운데 202년에 병사했다.

원소의 후계자를 원담원상이 다투면서 원씨의 세력은 양분되었다.

조조는 곽가의 진언에 따라 원담과 잠시 동맹을 맺고 원상과 싸워 204년 8월에는 원상의 신하 심배가 지키는 을 함락시키고 원상을 유주로 몰아냈다. 다음으로 원상의 세력을 흡수하려던 원담을 핑계 삼아 공격하여 205년 정월에 남피에서 원담과 곽도를 참수했다. 원담의 본거지였던 청주에는 장료 등을 파견하여 평정했다.

조조는 더욱 원상 등을 쫓아 유주로 진격하여 207년 8월에는 유성 전투에서 오환의 답돈을 참수하는 등 원씨의 명맥을 완전히 끊고, 더 나아가 오환과 요동의 공손씨를 복속시켰다. 또한, 관중과 병주 방면에서도 원씨 진영의 고간곽원을 멸망시키는 한편, 장연, 마등, 한수, 왕읍 등을 복속시키는 등 조조는 그 세력권을 크게 넓히게 되었다.

4. 2. 정치, 사회적 영향

5. 역사적 평가 및 현대적 의의

5. 1. 대한민국에서의 인식과 영향

대한민국에서는 14세기 역사 소설 삼국지연의의 영향으로 관도대전이 대중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유비, 관우, 장비 삼형제의 활약과 조조, 원소의 대결 구도는 많은 사람들에게 흥미로운 이야기로 각인되어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관도대전을 통해 드러난 조조의 리더십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위기 상황을 극복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지도자의 역할을 강조한다. 반면, 국민의힘의 과거 보수 정권에 대해서는 원소와 같이 분열과 내분에 휩싸여 국가적 위기를 초래했다고 비판하며, 통합과 안정을 위한 리더십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삼국지연의 제25장에서 백마 전투는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관우적토마를 타고 적진으로 돌진하여 안량을 찔러 죽이고 그의 머리를 베어 돌아왔다. 안량의 군사들은 혼란에 빠졌고, 조조는 이 기회를 틈타 공격하여 백마 전투에서 승리했다.

참조

[1] 서적 Jian'an 4: I 1996
[2] 서적 Jian'an 4 note 16 1996
[3] 서적 Jian'an 4: K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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